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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시사

뿌리 깊은 나무가 되지 못하는 대한민국


최근 사회에 심각한 고민을 던져주고 있는 학교 내의 폭력과 그에 좌절하는 아이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어른들과 소위 전문가라고 하며 언론에 등장하는 사회 전체의 안이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티브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세종을 주인공으로 하고 제목이 '뿌리 깊은 나무'라는 정도만 알 뿐 드라마를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내용을 알 길은 없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드라마의 제목이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이라는 것, 약 600여 년 전의 진리는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에 관한 되돌아봄이다. 뿌리가 깊은 나무가  바람이 몰아쳐도 부러지거나 흔들리지 않아 아름답고 풍성한 꽃을 피워내며 그 열매가 실하게 열린다는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열매가 썩는 이유는 흙과 뿌리가 썩었기 때문

 


단순히 나무를 깊이 심자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토양을 살피고 기초를 단단히 하며 나무를 깊이 심음으로써 그 뿌리가 제대로 내릴수 있으며 가지는 곧게 하늘을 향해 뻗을 것이고 그 기반 위에 탄생하는 꽃들과 열매들의 풍성함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교육을 백년대계(百年之大計)라고 한다. 백 년을 내다 보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 교육이고 그만큼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야 말로 조심조심 세밀하게 살피고 보듬고 털어내는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백 년의 앞을 내다보는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그 땅의 토양이 집을 짓기에 충분한지 검토를 하고 땅 파기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정도 큰 건물이라면 기초를 이루는 땅의 깊이가 지상의 그것에 못지않게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 것도 분명하다.
 

 

하물며 사람을 길러내는 백년의 사업이 어찌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으로 시류에 맞춰 이뤄질 수 있을 것이며 현상에 매달리는 방식으로 수많은 문제들에 대처해 나갈 것인가. 커 나가는 아이들이란 풍랑을 맞은 나룻배처럼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세심한 사회의 보살핌과 어른들의 배려가 있어야만 스스로 설 수 있는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너희 문제는 너희가 스스로 해결하라는 말도 안 되는 '자립'을 강요해서도 안될 것이지만 반대로 아이들의 마음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 역시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최근의 사태를 보면서 피해자 입장의 부모는 경악을 하며 혹시 내 아이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학교사회의 폭력성에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가해 학생의 부모와 같은 처지의 어른들은 내 자식의 그러한 '일탈'이 꿈처럼 믿어지지 않을 수 있다. 방송 등 언론매체에 또다시 수많은 전문가들이 등장해서 짐짓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대책을 논의하는 모습을 시시각각 보게 된다.

 


하지만 '교육'에 관한 전문가들의 토론과 처방은 먼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들린다. 주로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가해 학생과 같은 아이들에 대한 '인성'교육을 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는 식이다. 네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해 주고 너의 행동으로 피해를 받은 친구의 아픔을 되돌아보라는 식으로 훈계를 해서 가해 학생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게 하는 그런 방식을 주로 말하고 있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편의 계몽영화를 보는 듯하다.

 


삥 뜯는 것이 일상인 대한민국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백두에서 한라까지 일렬로 줄을 서야 하며 그 줄에서 이탈하는 순간 나머지 인생을 짐작하게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대학을 들어가는 과정부터 장래 수입과 직결되는 전공을 택해야 하고 아무리 똑똑한 젊은이라 해도 군대의 문에 들어서는 순간 누가 실세이고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터득해야 하는 사회. 직장에 취업을 하는 순간 서열에 의해 살아야 하고 혹시라도 학교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왕따는 물론 해고 등 생계의 위협으로 이어지는 현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윽박지르고 같은 대기업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는 서열구조. 같은 비정규직이라도 힘 있는 회사의 비정규직과 힘없는 회사의 비정규직의 구별. 사회의 서열구조에서 약한 위치에 있다 해도 자신보다 더 약한 자가 있다면 억압하고 뜯어먹어야 하는 비열한 사회.

 


조직폭력을 없애기 위해 폭력배들에게 인성교육을 시키고 벌을 가하는 식으로 대응한다고 해서 사회가 밝아질까. 그들이 뜯어먹을 먹이가 있고 그것을 먹기 위해서 서열과 폭력이 필요하다면 범죄는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구조가 바뀌어 비록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무엇인가 자신의 일을 함으로써 인정받고 사람답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학교에서, 사회에서 뒤처진 사람들이 인생을 포기하는 대가로 폭력과 남을 괴롭히는 방식의 삶을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아이들을 탓하는 사회의 비겁함

 


무력으로 헌정질서를 짓밟은 반란군의 무리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활보하는 사회. 그러한 자들이 60여 년 넘게 이 땅을 좌지우지하며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세습을 이어가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를 바꿔야 한다며 목소리 높이는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과 단체, 노동조합마저도 그 안에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며 소수의 목소리를 짓밟는 비 민주가 횡행하는 현실.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걸러내고 그렇게 걸러진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경쟁을 통해 치고 올라야 살 수 있는 사회 그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그러한 곳에서 학교폭력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러므로 그 해결책을 아이들에 대한 인성교육으로 가능하다는 말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면 공고해진 이 사회의 잘못된 구조를 깰 생각이 없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나는 과연 내가 속한 직장과 사회, 그리고 가정에서 입장에 따라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인가 아니면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 입장인가. 그때그때 다른가? 모두가 겸허히 주위를 둘러보고 사회문제의 본질을 직시함으로써 구조의 틀을 바꾸지 않는 한,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갈취하는 행태의 종말은 끝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의 불합리를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해소하려 한 아이들의 영혼이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그러한 폭력적 사회 구조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귀한 삶을 던져야 했던 어린 영혼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