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동과시사

민주노조의 정당성은 자기 성찰로부터 나온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이명박 정권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국민에 대한 불법 사찰에 대해 독일의 나치시대에서나 있을법한 일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을 했다. 또한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지지율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 중도실용주의도 아니며 하류 장사꾼 속셈이라며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친 자본정권인 이명박 정권에 대해 그를 지지했던 단체에서 비난의 목소리를 내는것이 보기 흔한일은 아니다. 특히 그들의 속성상 외부의 비난에 대해 똘똘 뭉치는것이 생존 법칙처럼 되어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에 대해 비난의 논평을 낸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것이다. 최근 보수라 자칭하는 언론들에서도 심삼찮게 현 정권 비판목소리를 내는것을 보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늘어가는모양이다. 

 이 기사를 접하며 그들에 대한 분석을 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우리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계기로 삼아야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흔히 세상을 사람사는 곳으로 바꿔보겠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진보니 운동이니 지칭한다. 지금도 이곳 저곳에서 자신의 안위와 장래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은 헤아릴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모여 있다 보면 그 중에는 사이비도 끼게 마련이고 세월의 흐름속에 정신이 훼손되기도 한다. 민주를 외치면서 반 민주적인 행태를 일삼는 자들이 눈속임으로 투쟁의 선봉장이 되기도 하고 각자의 현실적인 주판을 두드리며 그 눈속임을 눈감아주는가 하면 순수한 동지들을 선동하여 팔뚝질로 대중들을 이끈다.

 권위주의의 조직문화를 이끌기도 하고 민주는 온데 간데 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이어진다. 그곳에서 민주적 투쟁의 동지는 온데 간데 없이 상명하복만이 존재하는 거수기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예수의 이름을 팔아먹는 사이비 종교인과 마찬가지로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해 이용하기도 한다.

 나는 진보와 민주세력 전체의 문제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의 문제가 전체 문제의 단면일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의 문제를 침소봉대하는것은 경계해야겠다. 달을 가리키니 손가락 끝을 보고 있는 노동자 대중들에게 달을 보도록 도와야하는것은 바로 운동의 선봉에 선 활동가들과 간부들, 그리고 상급단체라 불리는 산별연맹과 민주노총의 의무사항이다. 인생을 걸고 투쟁에 앞장서는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수 없을만큼 많다. 하지만 그 틈에 묻어가면서 달이건 손가락이건 아예 보지 않으려 하는 노동자 대중을 대상으로 '그래, 너희들은 차라리 모르는게 낫다'라며 어떤것이 내게 유리한가에 따라 손가락만 보도록 잘못된 길을 이끄는 자들도 끌기도 하는것이 현실이다.

 달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먼저 달에 대해 정확히 인식을 해야 한다.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행동으로의 열정도 함께해야 그 목적에 다가설수 있다. 하지만 무사안일한 공무원처럼 그렇게 하루 하루 보내는것을 운동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한 행태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면 조직의 단결을 훼손한다느니 하며 소위 '조직보위론'으로 입막음을 하기도 하며 사소한 잘못이야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넘겨버리던가 워낙 힘든 투쟁을 하는것이니 웬만한 것은 그냥 눈감는식으로 너좋고 나좋고 식의 문화가 있는것도 현실이다.

 우리에겐 수구세력을 압도할 수 있는 자산이 있다. 그것은 바로 원칙이 바로 설 수 있도록 투쟁하는것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다. 민주노조는 이 땅의 노동자 대중의 생존투쟁을 이겨내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몇몇 사람의 이익과 부도덕한 무사안일주의에 그냥 맡겨둘수는 없는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민주노조를 살려내고 바로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겸허한 반성과 앞으로의 투쟁에 대한 진지하고도 진지한 고민을 통해 투쟁에 나서야 한다.

 현재 우리들의 안에서 그러한 반성이 이루어질만큼 자정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우리에겐 스스로 자정능력을 잃고 방황에 빠졌을때 채찍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민주 언론들이 있다. 하지만 겉으로 터지는 사건이나 어쩔수 없는 경우야 민주언론이라(혹은 노동언론)일컫는 언론들이 보도를 하기도 하지만 저 깊숙한 곳의 썩은 고름덩어리를 뽑아내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의 관심을 깨우는데 그리 적극적이지 못하다. 미디어 악법을 막아내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을 쳤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언론은 자본과 수구정권의 헌법 유린과 기본적 인권 말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내심으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무서운 질책과 감시의 눈을 떼서는 안된다. 민주언론은 이 땅 노동자 대중을 비롯한 국민 모두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아쉽게도 진보쪽에 가깝다고 하는 우리의 언론들이 우리들의 감춰진 문제에 대해서는 별 무관심인것 같다. 노동 언론들조차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눈을 감아버린다. 언론의 관심과 가슴 아픈 질책이 없이 과연 우리들이 진정한 발전과 자기 성찰이 있을수 있을까?

저들을 꾸짖기 위해서 우리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집회를 하여 겁을 주는것도 한 방법일수 있지만 우리들이 민주적인 모습이 어떤것인지 보여줄수 있을때 진정 저들의 반성과 국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낼수 있다. 미국의 반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베트남에 먼저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수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우리가 확고한 민주노조로서, 이땅 민주주의와 노동자 대중의 기본권의 보루로서의 참된 모습을 보여줄때 투쟁의 정당성은 확립될 것이며 현실적 승리의 열매도 함께 다가올 것이다.

미국 프로야구를 보면 투수가 던진 공이 땅에 살짝만 닿아도 심판이 새 공으로 바꿔준다. 오래전 흙이 묻은 공으로 던지다 미끄러진 공에 타자가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어서 그런 규칙을 정했다 한다. 이것이 원칙이 되었으므로 바운드되면 무조건 바꾸게 되는것이다. 돈이 남아 돌아서 바꾸는것이 아니며, 흙이 거의 안 묻었다고 해서 그냥 사용하는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원칙이다.

저들은 자기들이 지지했던 정권이 궤도를 조금만 벗어나는듯이 보여도 곧바로 엄한 질책을 한다. 그렇지만, 우리들과 우리들의 언론들은 정도를 벗어나는 스스로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잠깐만 생각을 되짚어봐도 등골이 오싹함을 느낀다. 깜깜한 방에 홀로 앉아 있는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뼈 아픈 자기 반성과 속죄 없이 희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