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내전 - 엥겔스의 독일어 제3판 서설
- 프랑스 내전에 관한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담화문 -
1870년 7월 23일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에 관한 첫 번째 담화문」
1870년 9월 9일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에 관한 두 번째 담화문」
1871년 『프랑스 내전』 칼 맑스 출판
1891년 3월 18일 파리코뮌 20주년 기념일에 『프랑스 내전』 엥겔스가 재출간
맑스 - 엥겔스 연보
1818 출생 1820년 엥겔스 출생 1845년 엥겔스 「잉글랜드 노동자 계급의 상태」출판 1845~1846년 『독일 이데올로기』공동 집필 1847년 맑스 『철학의 빈곤』출판 1848년 『공산주의 선언』공동 집필 1849년 맑스 『임금 노동과 자본』집필 1849~1850년 맑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집필 1852년 엥겔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집필 1852년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발표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창립 1864년 맑스 「국제노동자협회 임시 규약」과 「발기문」작성 1867년 맑스 『자본』제1권 출판 1871년 맑스 『프랑스 내전』출판 1875년 맑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집필 1883년 맑스 사망 1884년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집필 1885년 『자본』제2권 출판 1886년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집필 1894년 『자본』제3권 출판 1895년 엥겔스 사망 |
엥겔스의 독일어 제3판 서설
맑스가 『프랑스 내전』에서 두 번째 담화문을 언급하고 있고 두 번째 담화문은 첫 번째 담화문 없이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재출간에 두 개의 담화문을 첨부한다.
맑스의 놀랄만한 재능 역사적 대사건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아직도 일어나고 있거나 방금 종결된 때에 그 사건들의 성격, 의미, 필연적 결과들을 명확히 파악하는 힘. |
계급적 대립의 철폐 요구로 귀결
1789년 이후 프랑스의 경제적 정치적 발전으로 인하여 최근 50년 동안 파리는, 여기서 혁명이 일어 난다면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즉 자신의 피의 대가를 승리를 쟁취한 프롤레타리아는 승리한 후에 자신의 독자적인 요구를 들고 나올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 요구들은 그때그때의 파리 노동자들의 발전 상태에 따라서 다소 불명료하였고 심지어는 혼란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요구들은 결국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적 대립의 철폐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 이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물론 알지 못하였다. |
부르주아들의 노동자들에 대한 무장 해제 시도
1848년 의회 내 반정부파인 자유주의 부르주아는 자기 당파의 지배권을 보장해 줄 선거법 개정을 관청하기 위해 개혁 연회 개최 그들은 정부와의 투쟁을 위해 인민에게 호소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급진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층에게 앞자리를 허락 급진적 공화주의자들 뒤에는 혁명적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노동자들은 1830년 이후 부르주아들이나 공화주의자들이 예감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정치적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와 반정부파 사이의 관계에 위기가 닥쳐왔을 때 노동자들은 시가전 개시. 루이 필립은 자취를 감추고 승리한 노동자들이 ‘사회’공화국이라고 명명한 그러한 공화국이 나타났다.
사회공화국 사회공화국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노동자들 자신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국가의 한 세력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방향타를 쥐고 있는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자 노동자들의 무장해제를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5일간의 영웅적 투쟁 끝에 노동자들은 패배하였다. 무방비 상태의 포로에 대한 잔인한 학살이 뒤따랐다.
광적인 복수의 시초 (1848년 => 1871년) ☞ 프롤레타리아가 독립된 한 계급으로서 자신의 이익과 요구를 가지고 부르주아에 맞서 용감하게 등장하자마자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얼마나 광적으로 복수하는가를 보여 주는 최초의 일이었다.
☞ 하지만 1871년에 일어난 부르주아의 광란에 비하면 아직 어린애의 장난과 같은 것이었다. |
파리코뮌
1871년 파리코뮌의 경과
1월 28일 파리의 군대는 프로이센에 항복 3월 18일 정부의 새로운 수반 띠에르는 국민방위대의 대포를 탈취하도록 명령했으나 실패
파리코뮌의 성립
3월 26일 선거에 의해 파리코뮌이 구성 3월 28일 파리코뮌 선포 4월 8일 ‘개인의 양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학교에서 추방하도록 명령 4월 5일 코뮌 전사들이 베르사이유군에 의해 처형되는 것에 대응하여 인질 체포 훈령이 발령, 하지만 전혀 실시되지 않았다 4월 6일 국민방위대 제137대대가 기요틴을 끌어내어 공개적으로 태움 4월 12일 나폴레옹이 노획한 포를 사용해 주조한, 배외주의와 민족 간 적의의 상징이었던 방동-광장 전승 원주 넘어뜨릴 것을 결정, 5월 16일 집행 4월 16일 공장주들이 폐쇄한 공장들의 통계표 작성, 노동자들의 협동조합 결성과 경영에 관한 계획표 작성 명령 4월20일 제빵공의 야간작업 폐지 명령, 독점적 직업소개소 폐지 명령 파리의 20개 구청 관할로 이관 4월 30일 노동자들에 대한 사적 착취 도구인 전당포 폐지 명령 5월 5일 루이16세 처형에 대한 속죄로 건립된 참회 예배당 파괴 결정
※ 3월 18일부터는 이때까지 외국의 침입에 맞선 투쟁으로 인해 뒷전에 밀려나 있었던 파리 운동의 계급적 성격이 날카롭고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
베르사유 – 프로이센 군대와 맞선 코뮌
4월 7일 베르사유 군대 파리 서부전선의 센 강의 도하점 탈취 4월 11일 남부전선에 대한 베르사유 군대의 공격은 으데 장군이 격퇴 베르사유 군대 계속해서 파리 포격 베르사유, 프로이센에 포로가 된 프랑스 병사들의 송환을 애원 5월 초부터 베르사유 군대가 우월적 지위 확보 5월 3일~14일 베르사유 군대가 각 곳의 보루를 점령 5월 21일 배반 행위 등으로 인해 베르사유 군대 파리 시내 돌입
코뮌의 결말
8일간의 전투 끝에 코뮌의 마지막 수호자들이 벨빌과 메닐몽땅의 고지에서 쓰러짐 미친 듯 날뛰며 자행되었던 무방비 상태의 남자, 여자, 어린이에 대한 학살은 절정에 달하게 됨 후장총으로는 빨리 사살할 수 없자 경기관총으로 수백 명씩 한꺼번에 총살 ※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권리 수호를 위하여 과감히 일어설 때 지배 계급들이 얼마나 광포하게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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