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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노동

차별이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의 노동인권 교육의 의미


철학과 역사인식이 왜 중요한가를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죽은 활동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고기와 술을 먹는 고승의 모습을 본 새내기 승려가 존경하는 분을 따라하기 위해 자신도 고기와 술을 먹겠다고 선언 한다면 오히려 스승을 욕되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닐것이다. <청소년 노동인권> 문제에 있어 선구적 실천을 해 오신 한 선생님의 주장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채 임금노동자의 역사와 우리 사회에서의 청소년 노동의 본질적인 문제는 보지 못하고 그저 따라 외치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청소년 노동인권과 관련한 최근의 한 기사 맨 마지막 문장은 청소년을 가르치거나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며 동지로 봐야함을 역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짧은 문장에는 청소년의 노동인권과 관련해 오랜 세월을 지나온 한 활동가의 궤적만큼이나 다양하고 깊은 고민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배 활동가 중에는 문구만 따라 외치는 경우도 있어 보인다.


덧붙여... 이 기사의 마지막 문장에 관해 이야기 하자면... 보호하고 지켜줄 대상으로 '만' 보는 것과 보호하고 지켜줄 대상으로 '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에게 권리를 알려주고 사회적 보호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 마치 그들의 존재감을 무시하는 양 오도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듯 하다.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이 노동을 하는 현실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정상이 아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기가 넘어지더라도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수 있다. 넘어질때마다 붙잡아 주는 것은 아기가 스스로 서고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게 되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노동의 첫 발을 내딛는 청소년들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 속에 놓여 있지 않다. 이미 기울어진 배와 같은 우리 사회의 악마적 구조 속에 갇혀 버린 그들에게 그냥 기다리라거나 알아서 탈출하라고 할 수 만은 없는 일이다. 또는 기울어진 상태에서도 편하게 앉을수 있는 의자를 넣어 줄테니 기다리라고 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밧줄이나 사다리를 내려주든 혹은 유리를 깨고서라도 일단 구출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한숨 돌리고 정신을 차리게 되면 인간애가 넘치는 곳으로의 항해를 위해 그들과 함께 동료로서 새로운 배를 만들면 될 일이다.


단면만 보고 쉽게 비판하거나 일희일비 하는 일들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할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과정과 역사 그리고 철학적 성찰이 부족하게 되면 늘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양이 늘어나면 모순 역시 늘어나는 법. 최근 청소년 노동인권과 관련한 활동들이 여기저기 많아지고 있다보니 이런저런 말들도 들린다. 


경기도의 단체 9곳과 그 활동가들은 <경기도 청소년 노동인권 네트워크: 약칭 '노크'> 를 구성해 활동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의 주인공인 선생님을 비롯 다른 지역 또는 '노크' 밖으로부터 비난하는 소리가 전해져 온다. 물론 눈감고 만진 대상을 코끼리라고 하거나 고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하는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폄하는 없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눈 앞의 현상을 제대로 보기 위한 철학적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 걸린 급훈.

차별은 존재하니 살아남자는 글에서 오히려 솔직함과 절박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그 옆의 태극기는 역설적으로 국가의 의미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