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클라이맥스. 연극 무대 뒤에 대기하던 배우들이 각자 정해진 순서에 따라 등장과 사라짐을 반복하는 것처럼 진행되던 영화는 사경을 헤매는 기우를 업은 다혜가 나타남으로써 모든 주연 배우가 한 무대에 서게 된다. 커튼콜을 받으며 손을 맞잡은 채 관객에게 인사를 하는 배우들의 모습 같기도 하고, 마당극의 가운데에서 바삐 들락거리는 연기자들의 분주함 속 일사불란함을 보는 듯하기도 하다. 골든글로브의 ‘앙상블’ 상은 그래서 시의적절한 상이었다고 본다.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모르던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도망치는 장면은 매우 현실적이다. 근세가 피를 흘리며 죽음을 맞는 순간에 이미 파리 떼가 주변을 맴돌다가 그의 몸에 내려앉는다. 희비에 상관없이 찰나의 순간에도 기생이 진행되는 것이다.
노동은 사회적이다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과 얽혀있다. 아주 가느다란 실로.”
교육방송이 제작 방영한 <내 운동화는 누구>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글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액을 채취해 가공한 고무는 폴란드에 가서 필요한 크기와 모양으로 재단되어 운동화가 된다. 독일 함부르크의 항구로 보내진 운동화는 배를 타고 수에즈 운하를 지나 다시 인도네시아 인근 해역을 거쳐 부산항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운동화를 산다. 전에 신던 것은 신발장에서 깊은 잠을 자거나 버려진다. 내가 신는 운동화는 누가 만들었을까. 몇 사람이 만들었을까?
인도네시아 노동자는 6년에서 12년 정도 경력을 지닌 사람들이 등장한다. 폴란드에서는 48년 동안 한 공장에서 일했다는 노년의 노동자들이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운동화를 만든 시간이 소중한 삶이었다고 술회한다. 화물선의 항해사와 갑판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한국과 미얀마 사람으로 12년의 경력을 지녔다. 이들 각각의 노동은 그들이 살아 숨 쉬는 시간이었고 가족을 부양해 생존케 하는 힘이었으며 국가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은 에너지였고 전 세계에서 운동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발을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 한 켤레의 운동화는 단순히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노동자와 그들 가족의 삶이자 역사였던 것이다.
기생 또는 공생
사소해 보이는 물건 하나를 생산하는데에도 많은 사람의 노고가 들어간다. 그래서 노동은 ‘사회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돕지 않으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으며 인류는 멸망하게 된다. 사회적 노동은 인류를 발전시킨 토대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앞의 운동화의 예에서 보듯 누군가의 노력에 노력이 더해지는 방식, 이것은 모두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공생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반지하와 완전지하의 두 가족은 지상의 주인에 기생하는 사람들일까? 두 가족의 공통점 중의 한 가지는 '대만 카스텔라' 사업을 하다 망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사업에 투자했던 돈은 어디로 갔을까? 이들이 망하면서 먹어 치웠을까?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 돌고 있을 그들의 돈은 누구의 지갑에 들어가 있을까? 피흘리는 근세의 몸에 달라붙은 파리는 매우 상징적이다.
지상의 가족은 기생충에게 뜯기는 숙주인가. 그들의 부유함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기우는 아버지에게 약속한 대로 저택을 살 수 있었을까? 만약 사게 된다면 어떻게 돈을 모으게 될까? 기우는 박 사장의 과거 모습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의 몸에 붙은 파리 떼, 이것은 기생이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다. 공생할 것인가 기생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기생충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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