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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시사

단결과 투쟁이 노동자의 유일하고도 강력한 무기인 이유


단결과 투쟁이 노동자의 유일하고도 강력한 무기인 이유


제 130주년 ‘세계 노동절’에




경기도 마석 모란묘역의 고 이소선 여사(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묘비





5월 1일은 제130주년 ‘세계 노동절’입니다. 1886년 5월 4일에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하루 8시간 노동’과 인간다운 삶을 열망하며 집회를 하던 중 폭발물이 터지고 경찰의 발포가 이어지는 혼란 속에서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집회 참가자 중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고 결국 네 사람이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이를 추모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여러 나라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모임인 <제2 인터내셔널>은 5월 1일을 노동절로 선포했고, 1890년에 각국에서 첫 집회가 동시에 열림으로써 '세계 노동절(May Day)'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경우 일제 강점기에도 대공장과 항만을 비롯한 각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투쟁을 전개했고 광복 후에는 그 열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945년 11월 5일 출범한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전평)>는 ‘8시간 노동’과 같은 노동 문제뿐만 아니라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1947년의 노동절 집회 후 미군정은 <전평>을 불법화해 집회를 금지했으며 때를 맞춰 등장한 어용노조 <대한노총>이 자신들의 설립일인 3월 10일에 노동절 행사를 주최하면서 정신을 훼손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노동절은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1960년의 4월 혁명 이후 민주주의 회복 열기 속에서 결성된 <한국노동조합연맹(한국노련)>은 1961년에 노동절 집회를 열었으나 불과 한 달 뒤에 등장한 박정희 반란군 세력에 의해 간부들이 체포, 구금되어 해산됩니다. 박정희는 집권 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만들게 하고 4월 17일을 ‘근로자의 날’로 선포해 노동절의 정신과 가치가 계승될 여지를 없애버립니다. 1994년 김영삼 정권에 와서야 5월 1일로 기념일이 복원되었지만, 아직도 이름은 찾지 못한 채 ‘근로자의 날’이 공식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일 년에 단 하루 모여 집회하는 기념일을 대하는 권력의 태도가 어째서 이처럼 적대적인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하루를 기념하고 쉬는 날이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모순에서 기인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체제이면서도 시장의 교환 원칙인 ‘등가’ 교환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노동자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면 임금을 지급하는 자본가의 이윤은 제로가 됩니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자신이 주는 임금의 액수와 노동자로부터 받는 노동이 불평등하게 교환되어야 그 차액을 이윤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즉, 자본가가 가지게 되는 이윤은 노동자의 몫에서 빼앗아 오는 것인데, 이것을 다양한 형태의 자본가들 - 부동산 소유자, 금융 불로 소득자, 산업자본과 상업자본 - 이 나누어 갖게 되므로 이들은 본능적으로 단결하여 노동자와 적대적인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노동자들은 단결은 고사하고 여러 형태의 분열을 거듭하며 각자 자신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찍소리조차 낼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앞에서 간략히 살펴본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역대 정치 권력이 자본가의 입맛에 맞게 법과 제도를 만들어 노동자들의 단결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양한 형태의 자본가와 정치 권력은 한 몸으로 뭉치고 있음에도 노동자들은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생명줄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의 사회 구조에서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업별로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구조에서는 노동자들의 연대 규모가 기업별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산별노조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소속감이 다른 각각의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의 물리적 연합체이기 때문에 산별노조라 하더라도 끈끈한 결속력을 지닌 하나의 조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같은 공장 안에서도 정규직과 사내하청의 비정규직으로 구분하는가 하면, 화이트칼라니 블루칼라니 하면서 또 쪼개집니다. 학교도 교사인가 아닌가로 나뉘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비정규직과 정규직으로 분류되어 네 편 내 편으로 갈라섭니다. 이러한 현상은 미래 세대에도 대물림될 것이 불을 보듯 빤한 일입니다.


노비는 노비일 뿐입니다. 부자인 주인 또는 가난한 주인에 속해 있든, 큰 규모 혹은 작은 규모의 주인집에서 일하든, 외거노비이거나 솔거노비이거나 할 것 없이 누군가에게 삶이 종속되어 자신의 노동력을 빼앗기고 있다면 모두 노비입니다. 대기업 또는 중소기업의 노동자, 정규직 혹은 비정규직으로 각기 형태는 다른 경우라 해도 임금을 받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다면 모두 임금노예인 것입니다. 


노예가 노예임을 부인한다면 그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삶의 변화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죽음의 타이머를 켠 상태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노동시간을 누군가가 부당하게 가져간다면 그것은 단순히 노동력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강탈당하는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로 많은 이가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감동하고 새삼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노동은 개인적인 활동으로 보이지만 실은 ’사회적 노동‘으로 서로 유기체와 같이 맞물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의료진이나 소방관, 방역을 담당하는 공무원은 물론이고 눈에 띄지 않는 자신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을 노동자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위기를 막아내는 버팀목입니다.  


노동조합원들이 입는 조끼의 가슴 양편에는 대부분 ‘단결’과 ‘투쟁’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익숙하다 못해 이제는 식상하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째서 아직도 두 단어를 선택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언급한 여러 형태의 자본가들은 마치 초원의 어린 소 한 마리를 두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자와 하이에나, 독수리처럼 노동자의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부를 나눠 갖기 위해 본능적으로 단결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에서 노동력을 사려는 수요자들은 일치단결하여 수요독점 상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가격은 만들어 파는 사람이 결정하지만,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은 사는 사람이 미리 결정합니다. 노동력을 팔고자 하는 수많은 구직자는 각기 흩어져 낮은 가격에라도 자신을 팔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며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경이니 노동자들이 외치는 투쟁 구호는 공허한 메아리로 울리기만 할 뿐입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노동자는 하나라는 철학으로 단결, 투쟁의 길에 나서야 합니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하는 삶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탄압하고 노동조합을 적대시 하면서도 곁에 두려고 합니다.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있어야 이윤을 챙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도권을 쥔 쪽은 노동자입니다.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이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공포의 무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노동의 역사와 단결과 투쟁의 의미를 새롭게 새겨 보는 이번 노동절이 되길 바랍니다.










이 글은 노동조합이 발행하는 간행물에도 기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