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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피에타/설국열차

 

우리는 대한민국을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한다. 그런데 헌법을 아무리 뒤져봐도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라는 규정은 없다. 헌법 130개 조항 가운데 그나마 경제와 관련 있는 제119조는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한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균형, 소득 분배, 경제력 남용 방지를 통해 경제민주화를 해야 함을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쉽게 입에 올리는 자본주의의 진짜 모습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갑을 관계니 비정규직이니 하는 단어들이 날마다 세간에 화제가 되는 이 구조를 우리는 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에 관한 화두를 담은 두 영화가 있다. 전자는 '피에타', 후자는 '설국열차'다. 여기서는 짤막한 아전인수식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관한 본질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두 편의 영화를 통해 현실적인 우리들의 삶의 모습,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지 두 편의 영화를 통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매우 경직되고 마음대로 숨 한번 고르기 힘들었던 한국 사회에서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룬다는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해 진지한 성찰의 출발점일수도 있기에 두 영화의 경험은 작지 않은 즐거움이라 하겠다. 한편의 영화는 '독립'을 고수하며 반자본적인 형태를 띠고 있고 다른 한편은 자본주의적인 제작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자본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보여주는것 같다.

 

 

 

 

 

 

영화 '피에타'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생산자본이 금융자본에 종속되어 하루 하루 생산하는 이유가 오로지 이자를 막고 빚을 갚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것. 이곳을 통하면 대한민국 안에서 못 만들것이 없다던 청계상가의 수공업자들이 반지르한 시장(市長)의 말장난에 이은 개발논리에 밀려나 세상의 뒤안길로 내몰리게 되어,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급전을 빌리게 된 사람들의 모습은 '아 대한민국'에 이어 '필승 코리아'에 도취한 이 사회 대중들의 자화상이자 그림자였다.

 

고층 건물의 외벽 계단에서 뛰어내리는 자영업자가 내뱉은 말은 이 사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수십년 청춘을 바쳐 노동을 했건만 결국 재개발이니 뭐니 하면서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신앙으로 믿는 자들에게 송두리 채 바친것일 뿐이라는.

 

'피에타'가 자본의 핵심인 부동산 투기 신화와 금융의 잔인함을 지적했다면 '설국열차'는 한 발 더 나아가 그러한 모순된 사회의 구조를 보여주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인류 세계는 이미 이전의 사회를 지나와 있다. 그 전의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는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지만 이전 사회의 사람들과 기차를 포함한 물자들로 인해 지금의 사회는 유지되고 있다는 연관성은 보여준다.

 

그러므로 현재 기차의 모습은 느닷없이 탄생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의 멸망한 사회를 품은 채 달려오게 된 것이다. 피에타가 '강도'라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조명했다면 설국열차는 기차라는 공간을 통해 사회 구성원 모두를 망라하고 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상류층이 말하는 논리는 단순하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듯 상류층과 하층민 모두 원래 그렇게 태어났으므로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총리인 메이슨은 하층민을 구두에 빗대어 구두는 발에 있어야지 머리로 올라오면 안된다는 것을 강변한다. 정해진 자리가 있으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면 된다는 것이다.

 

또한 폭동이나 전쟁을 통해서라도 인구의 74%, 즉 적정 인구의 유지를 주장하는 상층부류의 외침은 인구철칙과 산업예비군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총리는 하층민들을 향해 일갈한다. 너희들이 기차 밖으로 나가는 순간 모두 얼어 죽을 것이며 이 기차에 타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기차의 운영자이신 윌포드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영화는 세상을 만들어 놓은 자본가를 대변하는 측과 이 구조를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는 세력 간의 투쟁과 번민, 그리고 알 수 없는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혁명의 기수는 기차의 맨 앞에 있는 기관을 탈취하여 자신들의 지배하에 운영하고자 한다. 기차의 지배자는 혁명가에게 자신의 신념을 설파한다. 이 기차는 바로 인류이며 절대로 멈춰서는 안된다, 네가 나의 뒤를 이어 이 열차가 멈추지 않고 전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지만 기차는 '인류' 자체가 아니라 그들만을 위한 체제였다. 인류라는 것은 기차와 기차 밖의 세계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어야 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고 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이 체제가 마치 태초부터 있어왔던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윌포드라는 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기차는 단지 그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람들을 상층과 하층으로 나누어 이들의 적절한 긴장관계를 이용해 충성과 복종을 이끌어내고 있는 인위적 장치일 뿐이다.

 

기차의 엔진을 5세 미만의 아이들이 유지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1800년대 산업혁명이 뿌리를 내리던 시절에 영국에서는 4세의 어린이부터 시작해서 10대의 어린이들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으며 젊음이 다 가기 전에 생을 마감했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조국근대화의 역군들도 10대의 어린 여성들이었으며 구로공단에서 청계상가에서 스러져갔다. 영화는 이런 잘못된 시스템을 놔둔채 기차의 운영자만 바꾸면 되는것인지 묻는 듯하다.

 

결말에 이르러 영화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기차의 운영자만 바꿔 계속 달리게 하는 것보다는 문을 부수고 기차 밖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이들보다 먼저 세상으로 나가기를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사람의 호흡을 수용하지 않는 빙하의 세상에 나가자 마자 얼음조각이 되어 버렸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보다 신념과 의지만으로 투쟁한 결과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구멍난 유리창으로 새어 들어온 눈꽃을 보며 바깥 세상이 녹고 있다는 과학적 확신에 의한 희망을 갖게 하면서 최소한의 비과학적이고 무모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를 제공한다. 뒤이어 새로운 세상으로의 탈출구인 기차의 막힌 출입문에 폭탄을 설치함으로써 세상의 변혁을 위한 과학적 지렛대가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설파한다.

 

세상은 아직도 캄캄한 어둠과도 같다. 이 미로를 벗어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 세상에 대한 과학적 확신과 더불어 그 변화의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필수 요건이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현재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핵심이다. 폭파된 기차를 버리고 바깥으로 나가는 영화의 설정은 일단 혁명의 시도가 중요하다는 시각에서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차의 군중들은 대부분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두 명의 어린 아이만 살아 남아 곰을 마주하게 된다.

 

이들이 어떻게 눈밭에서 살아남을수 있을까하는 기우는 살짝 접어두고 두 사람의 생존과 곰의 등장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보게 되는것은 중요한 장치임에 틀림 없어 보인다. 세상 변혁의 시작이 지양(止揚)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칼 맑스의 말에 비추어 보면 폭파되어 부서져 버린 기차의 잔해가 한계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장치들을 통해 희망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칼 맑스는 다음의 명제를 던져주고 있다. “낡은 사회가 이미 새로운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자기의 태내에 잉태하고 있다.”

 

설국열차의 권력자이자 운영자인 윌포드는 기차가 바로 '세계'이므로 지켜내야 한다고 강변하지만 알고 보니 그곳은 인류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세계'가 아니라 단지 상황을 이용해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그들만의 시스템일 뿐이었다.

 

2013년 현재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며 살고 있다. 빈부격차, 고용불안, 청소년 자살, 불확실한 미래 등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너도 나도 해결책을 제시한다. 영화 '설국열차'의 혁명가 커티스가 그랬던 것처럼 정예부대 몇명이 기차의 맨 앞칸을 장악하면 세상이 바뀔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많다. 하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아무리 바꿔도, 악한 사장님이 착한 사장님으로 탈바꿈 한다 해도 우리네 힘든 삶이 바뀌지 않듯이 기차의 앞칸을 장악한다해서 바뀌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커티스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세상이 바뀌어야 내 삶이 바뀌는 것이지만, 그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나의 몫이므로 내가 자각하고 과학적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것을 영화 '설국열차'는 말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엔진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 교체를 목표로 할 것인가, 문을 박차고 기차 밖의 다른 세상으로 향할것인가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