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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12인의 성난 사람들

 

 

 

 

96분짜리 흑백영화인 '12인의 노한 사람들'(12 Angry Men. 1957년작)은 미국의 형사사건에서 죄의 유무를 결정짓게 되는 배심원들이 한 공간에 모여 몇 시간 동안 각자의 논리를 앞세워 다툼을 벌이면서 결론을 모아가는 내용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영화의 겉모습은 매우 단순한 구성과 공간을 보여 주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관객을 흡수해버린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18세 소년이 법정에 앉아있는 모습으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살해 장면을 목격했다는 두사람이 있고 소년이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칼과 동일한 칼이 현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거기에 진술이 오락가락하는 하는 소년의 모습은 배심원들이 그를 범인으로 단정하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이 소년의 죄의 유무를 결정해달라는 판사의 주문에 따라 배심원들은 회의실로 안내되어 들어간다.

 

회의실에 자리를 잡은 12명의 배심원들 대다수는 볼것도 없이 소년에 대한 유죄를 결정짓자고 주장한다. 아무리 그래도 한 시간 정도는 토론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일부의 의견에 또 다른 이는 프로야구 보러 가야 한다며 윽박지르는가 하면 다른 배심원은 자신이 배심원을 한두 번 한 것도 아니라며 살인사건은 폭행이나 절도의 경우와 달리 오히려 결말이 확실하므로 결정을 빨리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예비 범죄자들이므로 이 소년 역시 범인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을 하며 소년의 유죄를 주장하는 배심원도 등장한다. 다수의 이와 같은 주장에 밀려 곧바로 표결에 돌입한 결과 11명이 유죄에 표를 던졌으나 누군가 1명이 무죄 표를 던지는 의외의 상황이 발생한다.

 

만장일치의 결과가 나와야만 하는 제도의 특성상 다시 논의를 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무죄 표를 던진 '배심원 8'(헨리 폰다 분)을 몰아세우기 시작한다. 이들의 공격에 배심원 8은 물러서지 않으며 차분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한다. 소년이 범인일 수는 있지만 아직까지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는 배심원 8은 무죄로 단정할 수 없는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해 설명한 후 자신을 제외한 11명이 투표를 다시 해서 전원 유죄의 결과가 나온다면 자신 역시 승복하겠다며 무기명으로 투표할 것을 제안한다. 유죄를 주장하는 11명이 자신감에 차 집에 빨리 돌아갈 생각을 하며 투표를 하지만 뜻밖에도 1표의 이탈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제 유죄 10표, 무죄 2표가 된 것이다.

 

배심원들은 예상과 달리 길어지는 논의 시간에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예감에 화가 나기도 한다. 소년이 가지고 있던 칼은 흔하지 않은 모델이라서 다른 사람이 소지할 가능성이 없다는 유죄 주장에 대해 배심원 8은 사건 현장 인근에서 구입한 같은 모델의 칼을 제시함으로써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칼임을 반증한다. 또한 살해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원래 시력이 나빠 안경을 착용하는 사람임에도 법정에 증인으로 나올 시에는 착용하지 않은 채 증언했으므로 소년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배심원 8의 차분한 반증에 무죄로 입장을 바꾸는 배심원이 한 사람씩 늘어나 결국 상황이 역전되어 무죄가 11명이 되고 유죄를 주장하는 이는 1명만 남게 된다. 끝까지 유죄를 주장하는 한 사람은 처음에는 나름의 논리를 펼치기도 했지만 이제는 무조건 자신의 말이 옳다며 억지를 부리다가 결국 무죄에 표를 던져 상황을 끝내게 된다. 영화도 함께 막을 내린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해 보이지만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의 결정이 한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대사에 나오는 말처럼 소년을 전기의자에 앉힐수 있는 결정을 정황과 느낌으로 결정하는 것에 대한 배심원8의 인간 존중을 수반한 과학적 모색은 이 영화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확실하지 않으므로 무죄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는 헌법에 있다는 배심원8의 말에 한사람의 생명을 두고 벌이는 논의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생각이 배심원들에게 점점 퍼져가면서 감정적 논의나 시간 때우기 회의가 아닌, 자신들에게 헌법이 부여하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배심원들의 토론 과정을 지켜보면 민주적인 논의가 무엇이며 내용과 절차에 있어서 어떤 모습을 지니는 것이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한 주권자들의 권리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심각히 새겨보게 된다. 처음에는 따져 볼 것도 없이 유죄를 주장하던 배심원들이 논리적 설득에 의해 다시 논리적 반론을 제기하고 또다시 재 논리를 펴는 배심원 8의 정연함에 수긍하며 자신들의 결정을 바꿔가는 흐름은 민부적 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정을 바꿈에 있어서도 배심원8의 말이 매끄러워서가 아니라 재차 의심해보고 논리를 점검해본 후 주장이 사실에 부합할 가능성을 따져본 후 번복하는 등의 모습은 말싸움으로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하는 배심원8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의도한 방향과 다른 결정이 나올지라도 수긍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하지만 그 결정을 하기 위한 재료들, 즉 충분한 증거자료와 논리적인 반대의견 그리고 그 반증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과학적인 논의가 있어야 한 사회와 조직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반대 논리와 주장을 억압하거나 구성원들이 충분히 생각할 재료를 제공하지 않은 채 영화에서처럼 야구 보러 가거나 밥 먹으러 가기 위해 빨리 끝내자는 식의 회의 모습은 반 민주적인 태도다. 대충 논의하고 반대 의견은 묵살하는가 하면 우리끼리는 식구니까 절차를 무시하는 식의 논의와 결정을 해도 별 문제없다는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 사회, 특히 민주를 표방하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과 조직들이 민주적 회의 진행의 교과서로서 이 영화를 볼 것을 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