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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시사

제123주년 노동절

노동절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그러면서도 해방되기를 애타게 원하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는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땅 밑의 불이다. 당신이라도 그 불을 끌 수 없으리라.”

 

 -       사형을 선고 받은 미국 노동운동 지도자 어거스트 스파이스의 법정 최후진술

 

 

8시간 노동을 외치며 미국에서 시작된 투쟁

 

1886 5 1일 미국에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첫 시위를 열었다. 수 많은 파업들이 전국적인 총파업 양상으로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때였다. 1884년에 염색 노동자 단체인 업종과 노동조합연맹 1886 5 1일부로 8시간 노동이 법정 노동일이 돼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이러한 움직임은 지도적인 역할을 하던 노동기사단(1869년 미국에서 창립된 연합조직으로 직업 성별 인종에 차별 없이 노동자를 조직)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갑작스럽고 폭발적인 파업열기의 분출에 따라 급속히 성장했다미국 전역에 파업의 붐이 일어나고 있던 1886 5월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린 파업 노동자들의 야간 집회에서 조작으로 의심되는 경찰을 향한 폭탄 투척이 있었고 이 사건을 빌미로 물리력을 총 동원해 시위 금지와 체포를 시작했다. 8시간 노동 동맹의 지도자 일곱명이 체포되었으며 그 중 네명이 사형 당했다.

 

 

노동자들의 국제적인 연대 투쟁 시작

 

1886년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은 유럽의 노동자들을 자극해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1889년 유럽 전역의 활동가들이 참가한 회합에서 제2 인터네셔널이 결성됐다. 인터네셔널은 1890 5 1일부터 헤이마켓 광장 집회를 기념하는 국제적인 시위를 주최하기로 하고 8시간 노동을 위한 대규모 운동에 돌입한다. 즉 제1회 메이데이(노동절)이 출발하게 된 것이다우리 나라에서는 식민지 공업이 급격히 발전한 1920년대부터 노동계급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어 동맹파업, 시위, 행진 등을 벌이며 전 세계 노동자들과 함께 메이데이를 경축했다. 1921 9월 부산 부두 노동자 5천명의 파업, 1922 3월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파업, 1924년 군산 도정 노동자들의 동맹파업 등 1920~1925년에 335건의 파업이 있었다.

 

 

일제에 맞서 투쟁을 이어온 조선의 노동자들

 

조선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 쟁취’, ‘노동자의 단결’, ‘일본 제국주의 타도등을 외치며 파업과 시위, 강연회, 기념 야유회 등 여러 방법으로 투쟁을 벌였고 1936년 노동절에는 서울 자동차 회사 운수 노동자 파업으로 시작 흥남 비료 공장 노동자 파업과 함흥 철 공장 노동자 파업으로 이어졌으며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노동자 370명은 만세 삼창을 하며 노동절을 기념했다해방 이후 노동자 투쟁은 폭발적으로 고양되어 1945 11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출범을 하게 된다. ‘8시간 노동제 즉각 실시’ ‘실업자에게 직업을공장폐쇄, 해고 절대 반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국가 전액 부담의 실업보험 즉각 실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등을 외치며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에 앞서 여성으로서 평양고무공장 노동조합 간부였던 강주룡은 1931년 5월 28일 한밤중에 대동강변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5월 29일 우리 노동자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1인 시위, 고공농성을 벌인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 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깍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둥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라며 굳은 의지를 천명한 강주룡은 감옥에서 풀려난 1932년 8월 13일 평양의 빈민굴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

 

미군정의 탄압과 대한노총의 테러, 감원 등에 항의해 1946 9월 총파업이 벌어졌으며 1947년에는 전평 지도부 체포에 항의해 3월에 총파업이 일어나게 된다.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미군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 35백여 명과 어용인 대한노총 회원 1천여 명이 동원되어 노동자들 여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정은 1947년 노동절 직후 전평을 불법화했고 전평 주최의 노동절 집회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전평의 붕괴에 맞춰 어용인 대한노총이 노동절 기념행사를 주관하면서 그 정신을 훼손하게 된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지지 결의대회로 돌변하는가 하면 주한 미 국무부 노동고문이 기념사를 하기도 했으며

북진통일 없이는 노동자의 살 길도 없다는 결의문이 채택되기도 했다이승만은 1957년에 이르러 메이데이(노동절)는 공산 괴뢰 도당들의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만치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을 제정하라날짜 변경을 지시해 노동절을 아예 없애 버렸다. 이승만이 쫓겨난 4월 혁명을 통해 새로 결성된 한국노동조합연맹(한국노련) 1961년 독자적인 노동절 기념 행사를 열였으나 박정희의 반란군에 의해 짓밟히게 된다. 박정희는 한국노련을 강제 해산하고 수백 명의 간부와 노동 운동가들을 체포 구금한 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만들고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을 제정했다.

 

 

반란군의 군사독재에도 끊임 없이 이어진 노동자들의 투쟁이 민주화의 축

 

반란군들의 군사 독재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힘겨운 투쟁은 계속 이어져 1979 YH노동조합의 투쟁과 전두환 반란군에 맞서 1985년 구로 동맹파업 등은 연대 투쟁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1985년 대우자동차 투쟁으로 시작된 임금 인상 투쟁에 이어 5 1일에 노동자와 학생 등은 서울 영등포 시장 로터리에 모여 노동절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어 1987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노동계급에 있음을 만천하에 선언했다노동자들은 1988 5 1일 노동절 제1백주년을 앞두고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강력한 연대와 투쟁정신으로 노동절을 치르기로 결의한다. 노태우 반란군 정권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파업과 시위 등으로 노동절을 기념하고 전국 40여개 대학 학생들도 규탄대회와 동맹 휴학에 들어가 연대를 표명했다.

 

결국 노동자들의 결의에 밀린 김영삼 정권은 1994근로자의 날을 다시 5 1일로 변경하고 휴일로 지정하게 된다.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은 세계 각국과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노동절은 전 세계 노동자들이 노동자 조직과 연대의 필요성을 되새기는 투쟁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