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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시사

노동절의 의미

노동절이 다가오고 있다. 노동절은 단순히 하루 쉬는 날인가? 아니라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노동절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노동인가 근로인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학도근로보국대

노동절인가, 근로자의 날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노동과 근로 이 둘의 거리는 우리들의 쉽게 섞어서 사용하기에는 그 태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정부의 부처는 고용'노동'부 이지만 노동 관련 법률은 '근로'기준법이므로 어느 것이 맞는 용어인지를 가려내는 일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근로' 하면 떠오르는 것으로는 근로보국대 勤勞報國隊 가 있는데 뜻을 살펴보면 부지런하게 일 해서 나라에 보답하자는 내용이다. 여기서 보답해야 할 나라는 일본의 천황을 의미한다. 노동이란 사람이 먹고 입고 삶을 영위하기 위한 행위를 말한다. 반대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죽도록 근면하게 일 하는 것이 근로다.

 

프랑스에서 1789년에 일어난 '대혁명'은 그때까지 이어져온 인류 역사의 틀을 깬 엄청난 사건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이 통치하던 구조를 프랑스혁명이 최초로 깨버린 것이다. 왕의 정치가 폐지되어 공화정이 시작되는가하면 귀족과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헌법의 제정을 통해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기치로 내걸은 것이다. 즉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정신이 이후 지금까지 세계를 관통해오고 있다.

 

 

프랑스혁명 기념일에 시가행진 하는 군대와 축하비행하는 전투기의 모습

프랑스대혁명과 민법의 소유권

 

왕과 귀족, 성직자들의 독점적 지위에 바탕을 둔 재산의 축적은 새롭게 피어나는 신흥 자산계급들과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으므로 프랑스혁명 이후 몰락한 기존의 세력들에 반해 새로운 질서의 필요에 의해 법전도 만들어지게 된다. 혁명의 혼란기에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하게 되는데 민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상법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근대 민법의 원칙인 '소유권 절대의 원칙' ' 계약 자유의 원칙' '과실 책임의 원칙' 등의 기본 원칙들이 만들어져 파생됨으로써 자본주의적 재산의 형성과 유지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희생은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산업혁명(1760~1840년)의 기간을 거치며 기계의 발달과 도시로 인구의 집중 등을 통해 자본주의는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지만 그 이면에서는 너무도 큰 희생이 뒤따르고 있었다. 대량생산과 분업을 위해 커다란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게 되었으므로 그곳에서 일해야 할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원래 농촌으로부터 온 농부들이었다. 하루 17시간 이상을 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밤을 새워 일을 하면서도 먹는것은 겨우 죽지 않을 정도였고 잠 잘곳도 없어 흙바닥의 방 한칸에서 여러가족 수십명이 생활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부부간의 불화는 가정문제라는 형식으로 표출되었고 생계비를 벌기 위해 여성들은 매춘에 나서기도 했으며 이 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길거리에 나가 불량청소년이 되는 등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불거지게 된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노동자

 

 

점점 열악한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저항을 하게 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을 노동자로 이용하던 자본주의는 급기야 가장 말을 잘 듣고 먹는 양도 적은 아이들을 처참한 노동의 현장으로 몰아넣게 된다. 당시 가장 선진국이었던 영국의 전체 노동자 중 아동들의 비율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는데 주요 산업의 아동 분포는 위의 표와 같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환경에서 강한 들풀이 자라나듯 생존을 위협받게 된 노동자들의 상황은 투쟁을 불러올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사람을 동물보다 못한 도구로 사용하는 이러한 행태들은 많은 지식인들에게도 고민을 안겼으며 이로 인해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문제점을 짚어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지게 된다. 1864년에 시작된 제1인터내셔널은 한 기업이나 국가의 모순이 다른 국가의 그것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여 국제적인 노동자들의 단결을 모색하게 된다. 미국 역시 유럽의 노동운동과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게 되어 노동조합들이 생겨나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목소리를 힘차게 내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의 투쟁 시작

 

유럽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밀려 새로운 세상인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의 수는 내전(미국 남북전쟁)이 끝나는 1865년을 지나며 2,500만명을 넘어섰는데 폭발적으로 늘어난 노동자로 인해 조건은 더욱 열악했으며 노동 강도는 더욱 세질수밖에 없었다. 멀리 아시아의 중국에서 건너온 노동자들을 습격하여 사망케 한 사건을 비롯해 구직난과 삶의 질 하락으로 노동자들간의 갈등은 남녀, 인종, 세대에 따라 그 골이 깊어갔다.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의 헤이마켓광장에서는 살인적인 노동시간의 단축과 노동조건의 개선 등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으나 경찰의 폭력에 물들게 되었고 이를 추모하고 노동자들의 요구 목소리를 정확히 하기 위해 재차 열린 집회 역시 폭력으로 정리되었고 제1인터내셔널 회원이자 노동자기사단의 멤버였던 어거스트 스파이스 등은 집회의 주동자로 몰려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1889년 재정비를 해 출범한 제2인터내셔널은 노동과 인류의 해방은 국제적인 조직을 가진 프롤레타리아의 힘으로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권력이 필요함을 역설하게 된다. 이들이 구호는 헛되지 않아 8시간 노동의 입법, 아동 노동 금지, 야간노동의 규제와 주휴제 시행, 차별 없는 노동조건 등의 요구는 현재 국제노동기구(ILO) 규약과 각국의 헌법과 노동법률, 그리고 대한민국의 근로기준법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제2인터내셔널은 시카고에서 벌어졌던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리며 1890년 5월1일부터 노동절(May Day)집회를 열기로 결의하였고 지금도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이 집회와 가두행진 등을 벌이며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이후 각국의 논의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연맹은 국제노동기구(ILO)를 설립하기로 하여 노동자들의 기본권리가 선언적으로 보장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제도일뿐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바뀌는것은 유럽 노동자들의 무수한 피와 희생의 대가로 한발짝씩 나아가게 되었다. 국제노동기구(ILO)에는 나라별로 가입을 하고 각각의 조항에는 하나씩 서명을 하여 가입하게 되는데 우리나라는 180개가 넘는 조항 중에서 약 25개 정도만 가입하고 있는 상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944년 5월 10일 제26차 회의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어 다음과 같은 선언을 채택하게 된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표현 및 결사의 자유는 필수불가결하다" "일부계층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에 위험하다".

 

 

한국에서의 노동운동

 

우리나라에서의 노동자들의 투쟁은 1920년대부터 본격화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수탈과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서의 이 땅에 살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동시에 투쟁도 일어나게 된 것이다. 1921년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절 행사. 1922년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맞섰으며 1923년 노동절에는 조선노동총연맹의 주도로 기념행사가 열렸고 1924년 군산도정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는 등 1920~1925년 사이에 약 3백 30여건의 파업이 발생했다. 1935년에는 서울 자동차회사 운수노동자의 파업,흥남비료공장, 함흥 철공장 등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1931년 5월 28일 평양의 평성고무공장에서 일하던 강주룡은 대동강변의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최초의 고공농성을 했는데 아래에서 질문을 하던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백 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3백 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1959년 3월 10일 당시 대통령관저이던 경무대를 방문한 대한노총 간부들

일본제국주의 압제로부터 광복한 직후인 1945년 11월 5일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출범을 하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1947년 노동절 직후 불법화되었으며 노동절 집회는 금지되기에 이른다. 이후 어용단체인 대한노총이 노동절 기념행사를 주관하면서 그 정신을 훼손하게 되는데 그들은 노동절 집회를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지지하는 결의대회로 변신시키는가 하면 "북진통일 없이는 노동자의 살 길도 없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급기야 이승만은 1957년에 "메이데이(노동절)는 공산 괴뢰 도당들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고 있으니만치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을 제정하라"며 노동절 날짜의 변경을 지시한다. 좌빨 종북몰이의 시작인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던 박정희. 그의 조국과 민족은 어디의 누구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소녀들의 희생을 딛고 성장한 한국의 70년대 자본주의

 

국민들이 죽음에 내몰리고 피난다니던 전쟁의 와중에도 자신의 장기집권을 꿈꾸며 야당 의원들을 체포하고 사사오입 개헌을 시도한 이승만은 1960년 4.19혁명으로 도망갔지만 곧바로 탱크를 앞세워 등장한 반란군 박정희의 집권으로 세상은 더욱 깊은 암흑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본격적인 산업화의 시기에 접어들어 겉으로는 발전 되는것으로 보였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배를 채우는 구조가 심화되어 10대의 어린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조국은 점점 근대화 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 해야 방값과 풀빵 하나 사먹기도 빠듯해서 끼니는 거르고 추워도 연료를 때지 못하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 더우기 시골에 두고 온 부모와 많은 수의 형제들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소년소녀 가장들은 이중고 삼중고에 시달리지 않을수 없었는데, 이렇게 해서 생산된 가발 등의 수출 성과를 군사반란군세력과 소수의 재벌들이 모여 나누었다.

 

구로공단 등을 조성하고 기계식 생산을 시작한 자본가들에게 싼값에 말까지 잘 듣는 노동자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물론 자식도 많이 낳아 가난에 허덕이던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공장 등 기업의 운영자들은 농촌의 아이들에게 서울 가서 공장에 취직하면 돈도 벌고 밥도 잘 먹을수 있으며 공부까지 할 수 있다고 꾀여내 노동자로 이용했다. 이 방식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의 어린 아이들을 속여 데리고 가서 근로보국대와 근로정신대로 부려먹은 수법과 거의 유사하며 150년 전 유럽에서 아동 노동자를 착취하던 구조와 한치도 틀리지 않는 것이었다.

 

 

전태일

 

일터 난간 밖을 주먹을 쥔 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전태일열사

탄압은 저항을 낳는 법. 생존조차 위협받는 벼랑에 몰린 노동자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투쟁의 몸짓을 시작하게 되었다. 너무나 가난해서 밥 잘먹고 사는것이 꿈이었던 1948년생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등 합법적으로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고 여기저기 호소했지만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기만적임을 인식하고 거듭나게 된다. 어린 여공(시다라고 불린)들에게 자신의 차비를 털어 풀빵을 40여개 사서 나눠주고 청계에서 쌍문동까지 걸어 출퇴근하던 전태일은 이땅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놀아나는 현실을 어떻게 하면 깰 수 있을지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한다.

 

우리들은 속고 당하고 살면서도 그것의 실체를 알지 못한 바보들이라는 의미에서 모임의 이름을 '바보회'로 정했던 그는 1970년 11월 13일 자신의 몸에 불사르며 모든 노동자들이 각성하여 투쟁을 통한 삶의 구조를 바꿀것을 간절히 바라며 세상에 경종을 울린다. 사회의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는 내었지만 이 땅의 근본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던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성은 이때부터 각성을 시작하여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것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어 공장 등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는 등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자본주의의 문제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한편 노동자들로부터는 노농자의 삶 자체를 배우게 되는 투쟁이 줄기차게 이어지게 된다.

 

 

노동자들의 각성과 투쟁의 물결

 

1979년 YH 여성노동자들의 농성

전태일의 분신 이후 노동문제가 이 사회 근본적 문제라는 인식을 하게 된 수많은 대학생을 비롯한 지성인은 민주화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각성은 노동조합의 설립과 투쟁으로 이어졌다. 1979년 우리 기업들 중 수출 15위이던 YH무역은 노동조합이 생기자 회사 문을 닫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직장을 잃게 된 여성노동자들은 항의를 하며 농성에 들어갔고 급기야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 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이어갔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반란군 정권은 무장한 경찰병력을 투입하여 진압하기 시작해 여성노동자 중 한명이 떨어져 사망하게 된다.

 

무너지는 모든 것은 그 징조가 나타나듯 이렇게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수많은 저항을 야기한 박정희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박정희에 못지 않은 악랄함을 보여준 전두환에 이르러 노동자 탄압은 극에 달하지만 그에 비례해 죽음을 각오한 투쟁 역시 들불처럼 이어졌다. 서울대 학생이던 박종철의 고문에 의한 사망과 연세대 이한열의 죽음으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무직 노동자들의 가두투쟁이 이어졌고 결국 반란군 전두환권력은 노태우의 6.29로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민중의 힘이 잔악무도하던 군사반란군을 물리친 것은 고무적인 것이었으나 실은 그들이 감추고 있던 발톱을 제대로 볼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사회의 중심으로 우뚝선 노동자들

 

1987년 7월~9월 노동자 대투쟁 당시 시위현장의 노동자들

하지만 자랑스런 노동자들의 7,8,9월 대투쟁이 이어졌으니 노동자들은 노태우의 항복 선언이 거짓임을 간파하였고 진정한 승리를 위한 투쟁은 이제부터라는 일치된 관점으로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수많은 민주 노동조합들이 생겨났으며 파란 작업복을 입고 거리를 자랑스레 활보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노력은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의 합법적 출발로 이어져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니 이는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주인으로 자각하고 함께 힘을 모아 투쟁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은 열정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방향을 정확히 짚지 못하는 투쟁은 패배만을 부를 뿐이다.

 

국민들이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노동자가 사람 대접을 받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하는 사이 현실은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신자유주의는 시작되었고 그 여파는 우리 사회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때까지 한국의 경제력이라는 것이 미미한 수준이었으므로 체감을 할 수 없었지만 국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던 1997년의 외환위기는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된다.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물론 고용불안과 열악한 노동조건이라 하더라도 어쩔수 없이 취업을 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비인간적인 대우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이윤을 위해서는 멈출수 없다

 

용광로에서 생을 마감한 젊은이의 죽음에 절규하는 한 시민의 시

 

2010년 충남 당진의 제철소에서 노동을 하던 20대의 젊은이가 용광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뜨거운 쇳물에 흔적조차 찾을수 없게 되자 누군가 시를 지어 세상에 호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쇳물 쓰지 마라'로 시작하는 호소에 아랑곳 없이 용광로는 멈추지 않았고 어딘가 건축자재 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된 것이다. 비정한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와 같은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재벌과 자본가들에게 노동자들은 늘 하소연을 한다. 우리를 굽어 살펴 줄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도 어쩌지 못한다.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가 사냥을 멈추는 순간 굶어 죽을수 밖에 없듯이 힘 있는 자들 역시 자신들이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순간 존재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자본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의 단결로

 

18세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새로운 발전을 이어왔다. 법률이 만들어지고 제도가 개선되는 등 노동자의 권리도 많이 찾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 모든 발전은 누군가 던져준 것이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들의 눈물과 피의 댓가라는 것을. 어쩌면 자본가들 역시 희생자일수 있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 건기가 오면 모든 물이 말라버린다. 몇모금 남지 않은 물을 찾아 많은 동물들이 몰리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서로 쟁탈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 사회 역시 한정된 돈을 놓고 다툴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쪽이 양보하면 다른 한쪽이 손해를 봐야하는 것은 물을 나눠 먹어야 하는 초원의 동물들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것인지 모두가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노동조합들이 파업(헌법 제33조)을 하면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면서 수구언론이 선동하고 국민들은 그에 부화뇌동한다. 집회와 시위(헌법 제21조) 현장을 지나는 사람들 중에는 길을 막고 불편하게 한다며 욕을 하는 이도 있다. 모든 국민은 각자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서로의 권리가 상충되는 경우에는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봐야한다고 헌법은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자기 땅이라 하더라도 주위 건물들의 일조권을 가리게 되면 땅주인 마음대로 건물을 지을 수 없다. 또한 어느 권리가 더 중요한 것인가는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결정된다. 길을 지나는 행인 개인의 입장에서는 집회하는 노동자들로 인해 자신의 보행할 권리가 침해받는것으로 생각될 수는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잘못된 점을 바로 잡을것을 요구하는 권리가 길을 지나는 행인의 권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되므로 대한민국의 헌법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무척 힘든 삶을 이어오고 있다. 국가적 위기의 원인은 바로 재벌기업들이었으나 국민들의 세금과 금모으기 등을 통해 경제를 회생시켰지만 그 결과로서의 힘든 삶은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이다. 재벌과 정부의 국민에 대한 권리침해가 심각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대부분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다.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광장에서의 요구와 1890년 제1회 노동절에서의 구호는 '8시간 노동'이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는 역사의 아픔과 투쟁을 통해 8시간 노동 등의 노동권리를 조금씩 찾아온 것이다. 길 막고 집회하는 노동자들을 비난한 적이 있다면, 하지만 스스로도 힘들게 사는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면 이번 5월 1일의 집회 대열에 동참할 것을 권한다. 자본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가 단결해야 하는 이유를 되새겨야 하는 날. 바로 노동절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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