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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시사

지금은 울 때가 아니다

2009. 5. 30 작성 글



2009년 5월 29일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인파가 서울 한복판을 가득 메운가운데 국민들의 하염없는 눈물은 뜨거운 날씨를 적시고도 남음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겠다고 했다. 그럴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이 나라는 OECD 국가라는것이 무색할 정도로 수십년간 그 본질을 바뀌지 않았다. 가신 분의 뜻을 기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작지 않은 용기가 필수적인것이 현실이다.


아닌것을 아니라고 말 할수 있는 용기. 눈 앞의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 하지 않을 용기. 말을 해야 할 때 거침 없이 잘못된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용기. 말로 통하지 않을 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가 있을때라야 바보 노무현의 뜻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에 다름 아니다. 독재정권은 독재를 휘두르는것이 그 속성이다. 문제는 그 독재의 칼날에 맞서 어떻게 대응을 하고, 주권자인 국민으로서 얼마나 그들을 꾸짖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객관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발표가 있었고 5월 23일 당일부터 국민들은 추모를 시작했다. 그 추모를 독재권력의 하수인들은 막아서고 짓밟았다. 그럼에도 별 다른 항의의 몸짓과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유족의 뜻에 따라 추도사를 하기로 되어 있던 분도 결국 독재정권에 막혔다. 여기서도 우리는 무기력했다. 심지어 만장에 사용되는 대나무를 불법시위의 위협이 있다며 독재는 또 막았다. 그러자 우리는 그들의 뜻에 따라 플라스틱으로 바꾸었다. 장례(禮)는 글자 그대로 예절이다. 절차와 절도가 지켜져야 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지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장례 행렬이 지나가기 무섭게 독재경찰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겼다. 모여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추모객이 아니라 예비 불법시위자 들이었다. 독재권력이야 원래 그런 속성이 있는 속물들이라 치더라도 주권자인 우리들은 순한 양처럼 길들여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바보 노무현은 편하게 살 수 있는 변호사의 길을 버리고 나섰다. 대충 정의감 있는 척하며 인지도만 높일수 있음에도 구속되는 길을 택했다. 3당 야합에 편승하여 인생을 탄탄하게 살아갈 수 있었지만 험난한 길을 걸었다.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역감정' 타파라는 큰 목적에 몸을 던졌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나라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했던 원인이 쓰레기 조중동에 있다고 보고, 그래서 정의가 바로잡히고 헌법정신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중동 등의 쓰레기들과 싸움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투쟁을 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이었지만 권력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이나라의 권력은 청와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간파한 노무현은 오히려 약자였고 오히려 투사였다.


그는 갔다. 모두들 한마디씩 한다. 그러나 그 분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이익을 버리고, 헌법질서를 바로 잡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그래서 소외된 이 없이 모두가 정신적 스트레스 받지 않을 수 있는 나라. 그러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진정으로 나를 버릴 수 있는 나 자신과의 투쟁에 나서지 않는다면 결단코 노무현의 뜻은 살아 숨 쉴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주권자가 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한 그 주권은 사이비들의 들러리일 뿐이다.




사진출처: 한국기자협회 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