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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법

노동권과 노동법

 

 

노동권과 노동법

 

 

 

노동법 공부라고 하면 보통 법률의 조문을 읽고 외우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공부는 진짜가 아닙니다. 그 법에 담겨있는 가치와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수박 겉핥기일 뿐입니다. 법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즉 법관 마음대로 법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법은 언제나 같은 잣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억울한 판결이 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 법을 다루는 사람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가치를 가진 사람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노동법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 이전에 누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가의 문제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자본가의 눈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으면 힘들게 살아가는 노동자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법은 다르게 작용 할테니까요.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본격화했습니다. 기계의 발명으로 인한 공장의 운영에는 많은 수의 노동자가 필요했으므로 세상은 농업 중심에서 산업 중심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계의 발명 등에 필요한 자금은 아메리카를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부터 빼앗은 금은보화를 기반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시작은 누군가의 아픔을 짓밟으며 시작되었으며 자본주의가 본격화된 산업혁명의 완성기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던 노동자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을 시작했으며 이에 맞서 탄압을 일삼던 자본권력은 때로는 노동자들을 달래는 방식으로 유화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노동법은 그 태생부터 투쟁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노동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여 달리는 마차의 당근과 같은 역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가진 채 태어났으며 누구로부터도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침해당했을 때 일어나 맞서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투쟁을 부정적인 것으로 가르칩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가 노동법을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란 임금을 목적으로 일하는 (근로기준법 제2조) 사람을 말하므로 임금노동자’가 보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한정된 금액의 돈(임금)을 두고 노동자와 기업은 줄다리기를 할수밖에 없고 이러한 현실이 노동법에 반영되어 진행되어 왔으므로 힘있는 사람들이 만든 노동법이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내용을 담은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3세는 1349년에 제정한 노동법을 통해 법에서 정한 것보다 많은 임금을 주는 사용자에게는 금고형을, 해당 노동자에게는 그보다 더 가혹한 벌을 주도록 정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노동자들이 힘을 모으는 것도 금지했는데 예를 들어 석공과 목수가 단결하기로 협약을 맺을 경우 모두 무효로 했습니다. 이와 같이 노동자들의 단결을 불허하던 법률의 조항은 1825년에 단결금지법이 해소될 때까지 중범죄로 취급되어 수백 년간 이어졌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마치 손이 묶인 채 링에 올라 시합을 해야 하는 권투선수처럼 자본가에 힘겹게 맞서야 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자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지만 한편으로는 자본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세력들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생산을 하는 노동자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노동자들의 저항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멈추게 할수도 있을 만큼 강력했습니다자본가들은 때로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 때로는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법과 같은 사회법들입니다.

 

 

 

법은 과연 누구 편일까요? 법의 존재 이유가 세상을 공평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기만 할까요? 기업이라는 것은 이윤을 최대한 많이 남기는 것이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이윤 획득에 방해가 될 것 같은 법을 그들은 왜 그냥 놔두고 있는 것일까요? 정경유착이라는 말을 우리는 흔하게 듣습니다. 어째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권력을 쥔 사람에게 굽신거려왔을까요? 아니 오늘날에는 그 반대로 권력을 쥔 사람들이 재벌들에게 아첨을 떠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법률을 다루는 최고의 위치에 있던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이 일개 법무법인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전태일은 19701113일에 꽃다운 22세의 인생을 던졌습니다. 그의 행동은 울분을 못 이겨 한 것이 아니었고 앞뒤 못 가리는 혈기에 그런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전태일은 21세기를 사는 현재의 젊은이들보다 더 돈을 갈망했고 출세하여 부모 형제와 따뜻하게 사는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그랬던 그는 짧은 인생을 경험하며 우리 사회의 모순들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불행이 단순히 개인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며 철학적인 인식을 한 후 열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안타깝게도 21세에 접어든 현재 우리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 대가를 알지 못합니다. 살면서 배운 경제학의 잘못된 논리와 노동에 대한 왜곡된 가치를 금과옥조처럼 믿으며 스펙 쌓기와 재테크, 대박의 꿈을 키우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을 뿐입니다. 민주노동조합의 조합원이라 해도 다른 것은 없습니다. '결사투쟁'이라는 구호는 난무하지만 결사의 결의는 없어 보입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만을 결사라고 한다면 노동자의 죽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요원한 일일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여기게 된 돈, 그 돈을 손에 쥐는 방법인 임금노동을 노동자가 손에서 놓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우리의 결사는 일말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노동자가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게 된다면 이미 세상은 바뀌고 있는 중일겁니다.  

 

 

 

노동법은 힘있는 자의 편입니다. 그 힘을 노동자가 쥐게 된다면 노동법은 우리의 편이 될 것이고 결국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피켓 들고 법원 앞에 서서 항의 하는 행위가 헛된 일이라고 폄훼할 수는 없겠지만 법이 동정의 눈길을 줄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할 것입니다. 노동자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어 제대로 된 단결로써 투쟁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노동법은 노동권이 제 기능을 할 때 부수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공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눈으로 하는 공부, 공부만이 노동자가 살 길이며 투쟁의 시작입니다.